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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겨울생명평화학교-무위당사람들
 생명평화결사  2015.02.10   조회 1880 

무위당 사람들과의 이야기


201527일 토요일


 


박소정-어제 덴마크에서 삶의 원형을 보았다면 우리 안에도 있다. 우리 안에서 가꾸어가지 않는다면 지식일 뿐이다. 오늘은 그런 삶을 실현하고 실천하는 곳을 만나보겠습니다. 무위당 장일순의 정신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분들을 모시겠다.


 


신난다-노래(쿰바야)


 


박두규-마음모으기 잠깐 하고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원주에서 아침 8시부터 서둘러서 네 분이 오셨다. 무위당 만위제 회장님이신 이경국 님 오셨고, 무위당 학교 황도근 교장 선생님, 한알학교 김용우 교장선생님 오셨다. 생명평화결사가 모시고 있는 스승 중에 한분인 목영주 선생님도 오셨다. 네 분이 원주에서 오시면서 무위당 선생님을 모시고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각자 무위당을 공부했지만 실제 무위당을 만나보지 못한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책이나 이야기를 통해 알기에, 나름대로 기대와 존경과 이러한 것이 있다. 구체적인 우리 생활에까지 자본이 침투되면서 생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커다란 하나의 해답이 아닌가? 그로부터 답을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병국 선생님은 무위당의 제자이시고 함께 일을 하셨고 그분의 삶을 함께 했기에 생생하게 말씀해 주실 것 같다. 황도근 선생님은 무위당의 정신과 사상으로 원주 사회를 엮어내며 원주 공동체의 많은 부분을 이루어주신 분이다. 김용우 선생님은 생명사상과 무위당의 정신을 생명평화 사상과 연계한 이야기를 해주실 것이다.


 


이경국-내가 수술을 해서 앉지를 못한다. 서서 하겠다. 김민해 목사님 보고 싶어 왔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도법스님을 모시고 계신 분들이 무위당을 60년간 모신 사람을 귀한 시간에 불러주셔 고맙다. 김성순 님을 아기 취급하는 모습을 보니까 생명평화결사가 살아 숨 쉬는 공동체 같다. 나는 강의하는 강사가 아니고 무위당을 모신 삶 속에 여러분 생각의 지표가 되고 운동을 통해 그 양반의 사상과 철학이 여러분이 일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다. 무위당이 생존해 계신다면 87세다. 그 어른이 돌아가신지 21년이 되었다. 무위당은 28년에 이 세상에 태어나 원주에서 대농의 집안에서 사셨다. 그 당시 원주에서 장일순 선생의 땅을 밟지 않으면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할아버지가 자수성가 하셨는데 그 돈을 거의 희사했다. 원주초등학교가 생길 때 학교 짓는데 어렵다고 하니 희사하고 해방이 된 다음에도 소작한 사람들에게 농사를 다 주고 해방 이후에는 오히려 가난해지셨다. 소작농 했던 사람들이 대농들을 얼마나 많이 고발했나? 공산주의가 되어서도 그 문중에 한 사람도 손가락질 하거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고발하지 않았다. 대농하면서도 좋은 일 하며 산 집안에서 41년의 5남매에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큰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 때 큰 병으로 돌아셨다. 할아버지가 무척 좋아한 아이였다. 죽지 전에 그 아이가 한 말이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소원이 있어요. 할아버지 천주교 나가세요. 성당에 나가보니 참 좋아요.”했단다. 할아버지가 약속을 했다. 그때부터 그 집안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마지만 상여가 나가는데 할아버지가 상여가 안 보일 때까지 잘 가라고 절을 했던,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집안이다.


무위당은 자연스럽게 큰 아들이 되었는데 큰 아들처럼 총명하지는 않았다. 무위당 선생님아래 동생도 총명했고 무이당은 둔했다고 한다. 원주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석차가 중간쯤, 성품은 좋아서 어려서부터 붓글씨를 많이 가르쳤다. 무위당 선생님 집안이 대농이니 많은 손님들이 오는데 그 당시 애국지사도 아주 많이 드나드셨다. 유명한 애국지사도 많이들 왔는데 청강 선생님이 무위당 선생님의 붓글씨를 지도해주셨다. 난을 특히 많이 지도해 주셔서 선생님이 붓글씨를 배웠다. 집안이 좋고 경제도 넉넉하니 서울 배제 중고등학교에 갔다. 그리고 서울 공과대학 공업전문대학에 입학했다. 단과 대학을 다니는데 종합대학을 만들자고 미군대위가 서울대 총장으로 왔다. 그때 단과대학에서 주모자로 데모를 했다. 그 양반이 옳은 일에는 늘 앞장을 섰다. 앞장서서 대모하다가 퇴학을 당하고 6개월 지내다가 서울대 물리대학 미학과에 복학했다. 미학교 3학년 때 6.25가 난다. 김지하도 문리대 미학과, 김민기, 유홍준도 미학과다. 6.25때 피난 와서 시골 노인네 집에 숨어있는데 한 사람도 고발 안했다. 원체 덕 있게 집안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공산주의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 한 사람도 고발을 안 해서 자신의 문중이 잘 유지되었다. 그 당시 무위당 선생님머리에 이가 많았다. 그래서 무위당은 머리를 깎았다. 원주는 아침에 아군이 점령하면 밤에는 인민군이 오고 맨날 싸우던 지역이다. 6.25 당시 원주는 아무것도 없었다. 장일순 댁도 산산조각이 났다. 낮에 밖에 나가셨는데 우리 국방군이 보고 일루 와봐. 모자 벗어봐했더니 머리가 까까머리였다. 그 양반은 머리에 이가 많아서 깎았는데 그 당시 인민군들이 머리를 밀고 다녔다. 그래서 그 날만 10명이 거리에서 잡혔다. 그 안에 공산주의자가 있는지도 모르지. 바로 산에 올라가 자기가 죽을 곳을 파라고 했다. 할 수가 없으니 자기 묘를 팠다. 다 파면 묘에 들어가 누워 총에 맞아 죽는 거다. 무위당이 마지막에 죽기 전에 성호를 그었다. 그 모습을 본 장교가 너 천주교야?” 물었더니 !” 대답했다. “올라와.” 그래서 다른 사람은 다 죽이고 그 양반은 살았다. 천주교 신자 성호 긋는 바람에 살아서 물자 지고 심부름하고 홍천까지 심부름하면서 고행을 했다. 어느 날 물자 지고 있는데 누가 담배를 주었다. 바로 선생님 집에 하숙하던 국방부 장교였다. 웬일이냐고 물어서 여차 저차 끌려왔다고 하니 이리 저리 알아봐줘서 집으로 올 수 있었다. 6.25 때 영어를 하니 거제도에서 통역을 좀 하고 1955년부터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6.25 이후니까 이북 사람들이 엄청 내려왔다. 학교에 선생으로 들어가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24세에 교장을 했다. 교장을 하면서 육영사업을 하겠다고 하는데 돈이 없었다. 당시에는 재산이 있어서 이것저것 팔고 원주대성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요즘 한국은행 총재도 대성학원 출신이다.


젊은 나이에 24-25살에 육영사업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28세에 대성학교 초대 이사장을 한다. 얼마나 괄시가 심했는지 국회의원 한번 하자.’했다. 정치적으로 힘이 있으면 무시를 안 하니까. 그래서 4대 때 출마한다. 무소속으로 출마하니 떨어졌다. 나는 4.19 혁명 때부터 무위당과 인연이 된다, 당시 노동운동의 대부였던 이창복이 내 동기다. 나는 중앙대학교에 다녔는데 그 때 데모하다가 6명이 죽었다. 경찰서, 읍사무소가 다 마비되었었다. 치안을 유지하려면 대학생들이 도와주자. 우리가 도와주자고 무위당을 찾아갔다. 넙죽 절하고 보니 인도의 간디 선생의 이야기를 하면며 치안을 유지해야지 학생들이 폭력을 쓰면 안 된다고 간곡히 말씀하셨다. 1주일, 10일 동안 읍사무소를 지켰다. 그렇게 치안 유지를 돕는 일로 무위당과 인연이 되었다. 무위당은 1960년에 다시 국회의원에 출마한다. 민주당 공천을 받으면 쉬운데 전쟁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며 무소속으로 나간다. 나는 무위당이 국회의원 출마할 때 동네 들어가서 청렴결백한 장일순을 국회로 보내자고 했다. 그때 무위당 선생님선생에게 반했다. 하루는 야 경국아, 너 바쁘지 않으면 우리집에 가서 한 달만 유숙하자.”고 해서 나와 김용규가 같이 지냈다. 김용규가 선거 전략을 하고 난는 유세를 했다. 매일 선생님 집에 가서 잤다. 12시까지 일을 보고 선생님 집에 들어갔다.


사모님은 경기여고 나오고 서울사대 1등으로 졸업한 기가 막힌 규수인데 원주로 시집을 오셨다. 상대가 대성학교 이사장이니 나는 선생이나 하면 남편 뒷바라지하면 되겠거니 하고 덕수궁 돌담길에서 만나 점심 식사를 하고 걸었다.


우리 무위당 선생님이 한족 귀가 어둡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제가 오른쪽 귀가 어두워요. 그러니 이쪽으로 서주세요.”하셨다고 한다. 우리 무위당 선생님이 인물이 좋다. 김목사보다 못하지만. 처음 만났는데 한쪽 귀가 어두운 것을 숨겨도 모자랄 판에 귀가 어둡다고 자기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시집오셨다. 그때 사모님 배가 만삭이었다. 사모님 집에서 자는데 새벽 1시에 가도 2시에 가도 사모님 하고 안자고 우리하고 잤다. “형님 들어가요.” 해도 손님 있는데 무슨 소리야하면서 우리와 같이 잔다. 아침 6시가 되면 그 건너편 방에 부모님 방에 가서 어머님 기침하셨어요? 내 놓으셔요.”하셨다. 가만 보면 요강이 나온다. 부모님이 요강을 내놓으면 화장실에 가서 비우고 바깥에 있는 수세미로 요강을 닦고 다시 넣어두시더라. 그 모습을 한 달을 봤다. ‘나는 저 양반 평생 믿고 살아야겠다.’


그때부터 나는 그 분 믿고 살았다. 무위당은 지금도 계신다.


5.16 쿠데타가 났다. 박정희도 그 일에 관여가 되어있다. 군대 안에서 있던 것을 넘겨주고 자기만 살았잖나? 다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 연장에 여순사건이 있다. 그런데 자기가 정권을 잡았다고 다 잡아들였다. 북진통일 말고 평화통일 하자는 말밖에 안 했다. 서대문 교도소에서 군사재판으로 8년을 받았다. 아내는 서울에서 3년간 직살 나게 고생했다. 나는 무위당 선생님국회의원 선거 같이 했다고 잡았다. 그러면서 군대 가면 놔준다고 해서 군대를 갔다. 어느 날 헌병이 와서 하루 밤 재우고 중앙정보국을 갔다. 1주일간 고문을 받았다. 나중에 장일순 알아?”해서 내 스승인데요.”했더니 스승은 뭔 스승이야?”하더라. 그때 군대에 있으니 어딘가 있으시겠지 했다. 10일을 맞다보니 나도 죽게 됐다. 폐를 검사해보니 폐가 나쁘다고 했다. 육군병원으로 실려가 치료받고 내과과장이 아는 사람이라서 6개월 만에 병가제대를 했다. 그러고 가서 선생님은 어디계신가 봤더니 춘천교도소에 계셨다. 무위당이 감옥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포도농사를 지었다. 선생님 나온 다음 집 앞에 파출소를 멋지게 짓어놓고 어느 놈이 오는지를 감시했다. 무위당은 빵이나 고구마 같은 것을 사서 파출소에 가져다주었다. 인간적으로 그렇게 겸손했다. 나는 선생님 모시면서 많이 보았다. 우선 그 어른이 사람을 대접할지 알았다. 교도소에 계시면서도 그랬지만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 가운데 늘 사람을 겸손하게 모셔라. 행동으로 보여준 가운데 우리가 감화했다. 그 어른이 정치 안전법에 걸려 다른 일은 못하고 붓글씨 쓰면서 자기 수행을 하셨다. 대작들이 많이 나왔다. 선생님 난은 웃는 난이 많다. 서양 사람이 와서 보면 그림이 이상하다고 한다. 그러면 김용우 선생님이 한국의 피카소라고 한다.


이소선 여사, 박종철 어머니가 기금 조성을 하려고 할 때 선생님을 찾아온다.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 그러세요하고 난을 그린다. 선생님이 줄 때 이소선 여사, 아무리 못 받아도 30만원 넘게 받아야 돼요그러면 인사동에서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콧방귀를 끼었는데 작품이 걸리기만 하면 잘 팔렸다고 한다. 그 사람 마음에 담긴 철학이 작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작품이 남으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주셨다. 한 살림 운동 힘들 때도 인사동에서 작품전 한번 하자고 하면 한꺼번에 4-5000만원을 벌었다. 그렇게 한 살림에도 많이 보태주었다. 1969년에 원주에 박재일이 왔다. 김지하는 목포중학교 입학했다가 원주로 왔을 때다. 무위당 선생님아버지가 양반이다. 재일이는 6.3 사태 주모자로 감옥에서 살다 나오니 취직할 학교가 없고해서, 그때 원주로 왔다.


나는 아무래도 선생님 뒤에서 뒷돈 댈 사람이 있어야 할 것 같아 돈을 벌고 있었는데 어느 날 경상도 촌놈을 데리고 왔는데 박재일이었다. 둘이 소주 4홉들이 3병을 먹어도 끄떡없었다. 선생님이 재일이하고 병국이하고 술 대작을 해도 끄떡없을 거다.”하셨다. 둘이 6병을 마셨다.


72년도에 한강 유역에 수해가 났다. 그 때는 이미 지학순 주교님이 원주에 오신 후이다. 지학순 주교님이 천주교 신자 중에 사람을 찾으니 사람이 없더란다. 개신교는 넥타이 맨 사람이 많은데 천주교는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장일순 밖에 없으니 지주교가 딱 이 사람이다했다. 지학순 48, 무위당은 38세였다. 지학순 주교가 청년들 교육을 시켜라.”했더니 장일순이 주교님 성당 담을 좀 헐으세요. 담이 없어야 사람이 다니지요.”했단다. 그때 담을 다 헐었다.


지주교님이 개신교에 가서 설교도 많이 했다. 70년대 삥당 사건이 있었다. 월급을 너무 적게 받은 버스 차장이 요금에서 300원씩 빼내서 동생들 학자금을 댔다. 그러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 개신교 목사님을 찾아가 말을 했는데 원주의 지학순 주교에게 가라.”고 했다. 그렇게 원주에 와서 지학순 주교를 만났다. 원주에서는 아주 심각했다. 무위당과 지학순은 논의를 했다. “이 삥땅이 죄냐? 아니냐?” 장일순이 말했다. “이것은 죄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이 삥땅 안하면 살 수 없는데 죄라고 하면 안 되지요.”


지학순 주교님이 기자들 앞에서 삥땅은 죄가 아닙니다.”하고 말했다. 당시 동아일보에 기사가 실렸다. “삥땅이 왜 죄가 아니냐? 그 버스 사장이 와서 이야기해야 한다. 왜 저임금을 주냐? 최저 생계비가 있는데 먹고는 살아야 한다. 이것은 서울시도 책임이고 대통령도 책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듬해 지주교가 무위당, 김지하와 함께 전력적인 일을 많이 했다. 지금은 김지하가 병이 들었다. 7-80년대 옥살이를 했는데 지금은 마누라 말만 듣고 있다. 텔레비전에 나와서 박근혜가 연임을 해야 한다고 떠들었다는데 미친거다.


그때 사람들이 다 모였다. 재일이는 6.3 사태 때 데모를 해봐서 75년에 데모 준비할 때 나는 원 교구 청년회장 다시 말하면 행동 대장이었다. 그러니까 밤에는 몰래 모의를 했다. 기도회를 시작했다. 천주교 신자들은 신부나 주교가 오라고 하면 온다. 부정부패 규탄하고 박정희는 물러나야 한다고 성명서를 냈다. 그것이 71년도다. 나는 행동 대장이니까 앞으로 나가야 한다. 신부님들이 덜덜 떠는데 나가요!”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데모를 했다. 신자들 나가고. 그것을 3일 동안 했다. 지주교 님이 버티고 있고. 박정희가 그랬다더라. “삥땅 사건을 가만두었더니 주교라는 놈이 까분다. 천주교에는 보수가 많다. 김수환 추기경도 그때 , 왜 지주교가 저걸 해?”했었다. 요즘은 지주교는 없고 모든 영광은 김수환 추기경에게 갔다. 나는 우리 주교님이 지도자라고 본다. 지도자의 배경에 늘 장일순이 주교님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애쓰셨다. 예수 믿는 것은 생활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활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를 사랑하는 운동이라고 말씀해주셨지요. 박수 한번 쳐줘요.


여기 황교수나 김용우 교장도 못들은 이야기가 많다. 지주교가 독일에서 35천만 원을 가지고 왔다. 그때 독일에서 지학순 주교에 대한 이미지가 높았다. 돈을 얻으러 갔는데 35천이 모였다. 당시 담양군 예산이 35천이 안되었다.


그때 사회개발 위원회 집행위원장 맡으면서 그 분들에게 물었다. 당시에는 협동조합을 몰랐다. “협동조합 식으로 합시다. 급한 일부터 집 쓰러진 것은 고치고 일 속에서 돈을 주더라도 2단계, 3단계 사업은 협동조합으로 합시다. 그리고 다 암송아지 한 마리 씩 사줍시다.”하셨다. 그 일을 박재일 회장이 했다. 농민들 속에서 16년 동안 가톨릭 농민회 회장을 하고 회의 때마다 이제는 먹을거리를 유기농으로 생산해야 한다. 이 우주만물 속의 땅을 살려야 한다. 땅을 안 살리면 정치가 산다해도 의미가 없다. 이 땅을 살려야지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겨주겠나?” 이것이 생명운동의 시작이다. 땅을 알칼리성으로 바꾸려면 비료, 농약 주지 말고 먹을거리를 유기농으로 생산해야 한다. 그때 눈을 뜨게 해주었다.


나는 건축자재를 판매해서 돈을 벌었다. 돈을 벌어서 선생님께 용돈을 드렸다.


724월 어느 날 교구청에서 나를 오라고 했다. 장일순 선생의 종이라서 무위당을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전에는 개신교 신자였다. 선생님에게 말도 안하고 천주교에 입문했다.


나는 65년도에 장가갈 때도 천주교 신자가 아닌데도 천주교 신자이신 무위당이 주례를 섰다. 그때 선생님의 나이가 38세였다.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했다.


교구청에 갔는데 지학순 주교하고 선생님하고 두 분이 계셨다.


병국아 너 사람 낚는 어부 한번 해볼래?” “사람 낚는 어부요? 그건 베드로가 했잖아요?”했더니 웃으면서 너 가게 접을 수 있냐?” “.. 안돼요.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가게를 접어라. 접어. 석 달 내로 접어.” 주교님이 계시는데 선생님이 접으라니까 하고 나왔다.


광산에서 광부들을 모시고 일하라는 거였다. 가게 정리하고 마누라하고 갈등이 많았다. 그때 박재일은 딸이 둘이고 나는 하나였다. 나중에 보니 박재일은 딸이 다섯이고 7-8년 만에 광산일 마무리 하는데 43때에 아들을 낳았다. 우리 아들의 대부가 박재일이다. 이런 관계로 연결되어있다. 일하는데 나는 광산에 혼자 갔다. 광산에 가서 협동조합을 하는데 광부들 모시고 해라 하셨다. 솔직하게 그대 우리 강원도에 석탄 매장량이 전국의 3분의 2가 넘었다. 광부가 35만 명이 넘었다. 천안, 장성 이쪽을 다니려면 길이 막혔다. 천안을 가려면 영주로 돌아서 6시간 기차를 타고 갔다.


주교님이 조금씩 동냥을 주고 요걸 밑천으로 해서 신용협동조합을 지도해라.”하셨다. 내가 신협을 알아야지. 당시 무위당이 신용협동조합 일을 시작했다. 강연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어서 그걸 가지고 광산으로 갔다.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곳이다. 동해보다 500미터 밑인 곳이다. 승강기 타고 내려가면 이미 공기가 없다. 바깥에서 ~” 소리가 나면 그게 공기다. 그게 없으면 죽는다. 200미터 300미터 내려간다. 7.8.9명이 한 조로 일한다. 이 겨울에도 그곳에 들어가면 45도다. 구경만 해도 땀이 난다. 거기서 신자를 만났다. “여기에 웬일이요?” “여기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생각해요?” “계시지요. 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아멘..”했다.


그런 것이 막장이야. 작업복의 땀을 네 번 다섯 번 짜야 밖으로 나온다. 농사일은 아무리 일해도 3천 칼로리가 소모되지 않는데 광부는 5천 칼로리가 넘는다

  2015년 겨울생명평화학교-도법스님, 김민해위원장님과 대화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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